리겔 땅에 있는 마을. 포도의 명산지. 이곳의 서늘한 기후와 구릉 지대를 이용하여 광대한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아아, 너희구나! 우리 마을에 온 걸 환영해.
소피아 해방군이어도 상관없어.
그 제롬을 해치워 줬으니 말야!
그놈은 누이바바와 손을 잡고 있는 대로 행패를 부리고 다녔어.
황제도, 도마 교단도,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지크 장군님만은 우리를 위해 싸워 주셨지.
어디의 누구인지는 상관없어. 그분은 훌륭한 인품을 가지셨으니까.
돌아가!
어떻게 지크님을…… 이 마귀 같은 놈들!!
장군님께선, 연인을 인질로 잡혀 할 수 없이 제롬에게 따른 거라고!
그 난폭한 제롬으로부터 우릴 구하기 위해 싸워 주셨는데……
소피아는 싫지만 너희에겐 감사하고 있어.
어? 왜 소피아를 싫어하냐고?
그야, 우린 땀을 뻘뻘 흘리며 메마른 땅을 갈고 있는데
너흰 미라님의 은혜인지 뭔지는 몰라도
제대로 일도 안 하면서 놀고 먹고 지내잖아?
그런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흥. 소피아 놈들이 여긴 뭣하러 왔어?
루돌프 황제 폐하는 말야, 영웅이시라고.
어차피 소피아 놈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왔구나, 아름.
지크 장군……
조금 전의 이야기, 역시 힘들까요?
…………
제롬을 쓰러뜨린 이상 리겔군에 계속 있을 순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너희에게 협력할 수도 없다.
……난,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과거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지.
네……? 기억이요?
그래.
아는 거라곤, 심한 상처를 입고 이 나라로 흘러들어 왔다는 것뿐.
그리고, 그런 날 구해 주신 게 루돌프 폐하셨다.
신원이 불분명해 투옥된 내게 이름을 주시고, 거두어 주셨지.
내게 있어 아버지와도 같은 분이시다.
결과적으로 배신하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너희에게 붙어, 폐하께 위해를 끼칠 만한 행동은 할 수 없다.
그렇군요. 루돌프 황제가……
알겠어요. 무리한 부탁을 해서 죄송해요.
아니……
…………?!
자, 잠깐 기다려라, 아름!
네?
아름…… 너 왼손에 흉터가……?!
이거 말인가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있었어요.
그렇군……
루돌프 폐하께선, 과거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왼손에 십자 모양 흉터를 지닌 이를 만나면, 그에게 모든 걸 바치라고.
그가 바로 리겔을……
그리고 이 발렌시아를 구원할 선택받은 자라고,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뜻이죠?
나도 잘은 모른다……
하지만 네가 그 흉터를 지닌 이라면 이것은 곧 폐하의 의지.
아름, 난 너를 따르겠다.
지크를 동료로 영입하겠습니까?
그래……
폐하의 뜻에 따르고 싶지만 네가 원치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내 힘을, 널 위해 쓰게 해 주지 않겠나.
이건 폐하의 뜻이기도 하다.
너희, 리겔 성으로 가려는 거냐?
그래……
폐하를 위해서도 그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허나 이 앞엔 저주받은 용의 산이 있어.
사룡이 끊임없이 출몰한다는 말도 있지.
게다가 잦은 분화로 길이 막히기도 한다네.
흥……
제롬을 쓰러뜨렸다고 해서
그 저주받은 용의 산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기껏 해야, 사룡의 밥밖에 더 되겠어?
지크님께선 과거의 기억이 없으시대요.
심한 상처를 입고 해안에 표류하신 걸 티타가 발견해 돌보아 드렸죠.
지크님께선, 그…… 미모가 상당하시잖아요?
티타도 순식간에……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아, 지크님…… 남몰래 사모하고 있었는데……
당신들 따위, 용의 산에 사는 사룡에게 잡아먹혔으면 좋겠어요!
………………
왜 그래? 아름.
아…… 응.
내 왼손에 있는 이 흉터 말야 도대체 뭘까 싶어서……
아, 지크가 말했던 발렌시아의 구원이라던 거?
또 엄청난 사명을 짊어져 버렸네. 하핫……
그러게……
……어, 설마 진심이었어?
아니, 그러니까…… 딱히 믿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우린 지금 소피아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잖아.
그게 발렌시아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걸까 싶어서 말야.
으~음…… 뭐,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듯하긴 해.
그러고 보니, 세리카한테도 있었지? 그 흉터.
아……
그럼, 세리카도 이 세계를 구할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건가.
너희가 만난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운명……
그~러~니~까, 하나하나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한 내가 다 창피해지잖아!
……아, 미안. 네 말이 맞아.
그래도, 나와 세리카의 만남이 운명이라니……
어쩐지 그렇게 믿고 싶어지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