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치는 도제의 야망과 클레베 일행의 의지가 격돌한다. 치명적 궁지에 빠진 해방군의 총력전!
슬레이더님. 전 부대, 준비 완료했습니다!
음.
하여간 도제님께서도 마무리가 허술하시다니까.
드디어 리마 4세를 암살한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기사단 놈들에게 쫓겨 자기 요새로 도망을 치시다니.
녀석들, 고작 5백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도제님의 3천 병사를 물리쳤어.
역시 소피아 기사단…… 아니, 지금은 소피아 해방군인가.
뭐가 해방군이야? 반란군 자식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네놈들이 아무리 어설픈 정의를 표방하려 한들,
유력한 제후는 모두 도제님 산하에 있다.
이미 이 소피아 왕국은 도제님의 것이란 말이다!
이번엔 1만의 병사를 준비했다.
아무리 성에 틀어박혀 방어를 철저히 한다 해도, 반드시 한계는 올 터.
자,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큭큭큭…………
클레베!
아무래도 도제의 병사들이 준비를 모두 끝마친 것 같아.
공격해 오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그래……
농성 중인 우리가 유리하다곤 하지만
저만한 수의 병력을 상대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아무튼, 최소한의 피해로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아아, 그래.
국왕 폐하께서 돌아가신 지금, 이 성마저 도제에게 빼앗긴다면
소피아 왕국은 명실공히 놈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아.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뭐, 놈들이 공격해 올 경로는 뻔하지.
그곳의 방어를 강화하면 적이 아무리 들이닥친다 해도 문제없어.
아무리 들이닥친다 해도…… 그래.
클레베?
아니, 아무것도 아냐.
넌 정말 믿음직스러워. 오늘 활약도 기대할게.
에이…… 놀리지 마.
그럼, 모두에겐 그렇게 전할게.
그래.
클레베.
루카…… 적의 움직임은 확실한 거지?
네. 틀림없습니다.
역시 도제는……
그만. 난 아직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 해방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제를 쓰러뜨리고
이 소피아 왕국을 재건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선……
오라버니! 여기 계셨군요.
전 어느 쪽으로 가면 되나요?
……어머, 회의 중이셨군요. 혹시 제가 방해가 됐나요?
아뇨, 다 끝났습니다. 걱정 마세요.
루카……
알고 있습니다. 전부 제게 맡겨 주세요.
오라버니…… 표정이 무서워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냐.
자, 자리로 가자.
어머? 오라버니.
저런 곳에 페르난이 있어요.
뭐라고?
……………………
……페르난?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어.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제때 도착하지 못할 거야.
아…… 아아, 미안. 아무것도 아냐.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네 심정이 어떨지 짐작은 가.
힘들면, 무리해서 전선에 나가지 않아도 돼.
……시끄러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괜히 마음 쓰지 마. 오히려 불쾌하니까!
페르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께선, 페르난을 걱정하고 계신 거라고요.
……………………
페르난…………
오라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항상 저렇게 날이 서선 호통만 쳐대기 일쑤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진지하게 들어 주지 않아요.
클레어, 그건……
그야, 가족을 잃어 괴롭다는 건 알아요.
저도 이렇게 슬픈걸요……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저희는 예전의 상냥했던 페르난까지
잃어야만 하는 건가요?
오라버니, 제게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클레어…… 네 마음은 분명 페르난에게 전해졌을 거야.
하지만 이 세상엔,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아픔도 있어.
지금은 그냥 기다려 보자. 페르난이 자신을 되찾을 때까지.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함께였잖아.
우리가 페르난을 믿어 줘야지.
오라버니…… 네, 알겠어요.
저, 페르난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성을 낸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앞으론,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지켜봐 줘야겠어요.
그래, 잘 생각했어.
그치만 쓸쓸할 땐, 오라버니께 어리광 부리게 해 주실 거죠?
하하하…… 그건 항상 있는 일이잖아.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이, 오라버니도 참……
………………………… ……오라버니, 라…………
……흑…… 으흑…… …………큭…………!
우와, 엄청난 대군이야! 어디서 이렇게 모아 온 거지?
아무래도, 유력한 귀족 제후가
대부분 도제 밑으로 들어갔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야.
한심하기 그지없어…… 왕가가 있어야 귀족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왕을 죽인 놈의 졸개를 자처하다니!
그렇다곤 하지만 죽은 왕을 생각해 봐.
백성들이 배를 곯고 있는데 자기는 매일 흥청망청 놀고 먹고.
솔직히 다들 죽어서 속시원해 하고 있을걸.
저 잘난 귀족들도 마찬가지라고.
……너, 그거 절대로 클레베님 앞에선 말하지 마라.
그렇다 해서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려도 된다는 건 아니니까.
혼란 말이지……
의외로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건 우리 해방군 쪽 아닌가 몰라.
우리 같은 평민들은 누가 나라의 왕이 되든
대충 목숨만 연명할 수 있다면 그걸로 끝이잖아.
언제까지고 전쟁을 계속하는 것보다
후딱 성을 비워주는 쪽을 기뻐하지 않겠어?
파이슨!
알~아. 난 뭐 말도 못 하냐.
아~아, 그건 그렇고 진짜 숫자 한 번 너무하네.
농성전이라곤 하지만, 정말 이길 수 있을까……
폴스, 파이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루카!
무슨 일이야? 네 자린 여기가 아니잖아.
네. 그렇습니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전투가 시작되기 전, 두 사람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자아, 가라! 반란군 놈들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이만한 병력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실력을 보여 봐라, 클레베!
여기까지 침입당하면 이제 막을 수 없어……!
소피아 성이…… 우리의 성이…………!!
큭………… 이 이상은……!
젠장, 물러날 수밖에 없나……!
미안…… 난 물러날게……!
더는 싸울 수 없겠어요. 전 물러날게요……!
이 이상은 무리일 것 같네요…… 물러나겠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물러나겠습니다……!
아야야야………… 더는 무리야.
너희가 부르짖던 명예로운 소피아 따위 옛날 옛적에 망해 버렸다고.
자아, 왕좌를 내놓으시지!
크헉…… 이 건방진…………!
체념이라곤 모르는 망령들 같으니……!!
젠장, 반란군 자식들! 설마 이렇게까지 끈질길 줄이야……
이래선 도제님께 받은 병사가 바닥날 판이잖아.
그 녀석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슬레이더님! 지금 막, 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오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잖아.
큭큭큭…… 놈들도 이제 끝이다.
자아,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영원히 잠들어라!
아무래도, 끝이 보이는 것 같군.
다들, 잘 버텨 주었다. 도제군도 많이 지쳤으니
슬슬 포기하고 퇴각할 터.
아니…… 클레베! 저길 좀 봐!!
! 원군이라고?!
녀석들, 아직도 숨은 병력이 남아 있었나.
아니어요, 오라버니. 저들을 잘 보세요!
저기요, 저 깃발!!
저건……
……설마…… 리겔군…………?!
도제 자식, 리겔 제국과 손을 잡은 건가……!
듣고 있나, 반란군 놈들!
이 깃발과 병력이 의미하는 바는, 어리석은 너희라도 이해할 수 있겠지?
도제님께선 소피아 왕국의 대표로서
정식으로 리겔 제국과 맹약을 맺으셨다.
알겠느냐?
제국은 도제님을, 소피아의 진정한 지배자로 인정했다는 거다.
자아, 이제 이 대륙 어디에도 너희의 정의는 없다.
그 성을 넘겨라!
이 무슨…… 도제 자식…………!
국왕 폐하를 시해한 걸로도 모자라
소피아 왕국을 리겔에 팔아넘길 작정이냐……?!
……………………
……어떻게 할래, 클레베.
조금 전 전투로 우리 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이 상태로 리겔군까지 상대하는 건 무리야.
백기를 들고 항복해 놈들의 손에 처형당할 것인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을 것인지……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페르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게 현실이야, 클레어.
뭐, 안심하라고.
나와 클레베, 그리고 마틸다의 목과 맞바꿔
너희 목숨 정도는 지켜 달라고 교섭해 볼 테니까.
단, 살아남은 후의 일은 보장할 수 없겠지만 말야.
그런 건 싫어요! 어느 쪽도 싫어…………!!
에~…… 나도 둘 다 싫어.
너란 녀석은 여기까지 와서……!
해방군으로서 마지막까지 명예롭게 싸우다 죽을 생각은 없는 거냐?!
그치만, 누가 봐도 질 게 뻔한데 싸워 봤자 헛수고잖아.
그보단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
맞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루카, 너마저……
……아니, 잠깐. 너, 설마 이걸 위해……?
네. 클레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정말인 것 같군.
도제에게도 귀족으로서, 기사로서의 긍지가 있을 거라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던 모양이야.
아뇨.
양심을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걸 어리석다 말하는 나라로 만들어선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래, 알고 있어. ……전부 네게 맡길게.
왜 그러냐, 반란군 놈들. 대답은 아직이냐?
그렇게 겁먹지 말라고. 난 자비로운 남자니까.
땅바닥을 기며 싹싹 빌면 목숨 정돈 살려 주지.
단, 노예가 되는 것 외엔 살 길이 없겠지만 말야.
아~핫핫핫……!
저건……
슬레이더님, 성벽 위를 보십시오!!
음? 성벽에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아닛?! 저건……!
………………
저건, 성에 살던 리겔인들이잖아!
큭, 전투가 시작되기 전 도망친 게 아니었나……!
보입니까? 슬레이더.
소피아 성 밑에 살던 리겔인은 전투 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이제 막 동맹을 맺은 리겔 제국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긴 싫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쥐새끼처럼 리겔인만 쏙 빠져나가려 한다면
그 전모를 누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될 것을 염려해 대피할 것을 지시한 거겠죠.
큭……!
이대로 농성을 계속하는 건 이쪽으로서도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원하시는 대로, 이 성은 넘겨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물러날 때까지
절대로 공격하지 말 것.
그걸 어길 시에는, 용서 없이 포로의 목을 베어 내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젠장!!
리겔인의 목숨 따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클레베 자식! 이렇게까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나올 줄이야……
이제 조금이면 되는데, 이 지긋지긋한 반란군 놈들……!
잊지 마라, 내 언젠가 반드시 너희의 씨를 말려 버릴 테니까!!
……………………
오라버니……
클레어, 지금은 내버려 두자.
우리의 마음의 지주였던 소피아 성을 빼앗겨 버렸어.
기사로서, 해방군의 리더로서
그의 긍지가 얼마나 상했을지…… 나조차도 짐작할 수 없어.
마틸다님…… 저도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아요.
저희는, 이제 두 번 다시 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요?
기사단 분들과 함께 보낸 추억들이 그곳에 잔뜩 남아 있는데……
클레어…………
……이럴 땐, 어쩐지 소외감이 느껴지네.
오오, 웬일로 마음이 맞잖아.
그런데 말이야. 루카, 아까 좀 무서웠지?
우리랑 같이 어울려 다니곤 하지만
역시, 그 녀석도 기사였어……
그러게……
이게 바로, 나고 자란 환경의 차이라는 건가.
………………
어, 너 쓸데없는 생각했지?
어차피 그래 봤자 기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봤자 헛수고라니까.
무…… 무슨 그런 막말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난 내 자신을 믿어.
까짓 거 기사 하지 뭐. 그래, 하면 되지!
히힛…… 그러셔?
그런데 말야, 왕도 성도 없어졌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아…………
어이, 루카. 도대체 어쩔 셈이야.
페르난…… 무슨 말씀이시죠?
시치미 떼지 마!
왜 나한텐, 성 밑의 동태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
클레베와 둘이서 몰래…… 네가 참모라도 된 것 같아?
아는 이가 많을수록 적에게 알려질 위험도 높아집니다.
실제로 마틸다한테도 알리지 않았고요. 그녀는 납득해 주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포로를 인질로 내세워 협박하다니 야만인과 뭐가 다르냔 말이다!
그러한 짓을 우리 해방군의 동의도 없이……
시골 출신은 다들 이렇게 천박한가? 귀족의 망신이 따로 없어!
……우리에겐 허례허식보다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페르난, 당신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격정에 휩쓸려 전체를 보지 못한다면――
닥쳐! 잘난 척 떠들지 마!!
…………………… 전부, 클레베의 동의를 얻어 한 일입니다.
전 보고가 남아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자, 일단 남서쪽 사당으로 향할까요.
그곳엔, 저희가 원정 당시 사용했던 아지트가 있습니다.
……듣고 계십니까? 클레베.
아, 그래.
……미안하다, 루카.
결국, 모든 책임을 네게 떠넘기고야 말았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우는 소린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내일부턴 어떻게 성을 되찾아야 할지만 생각해 주세요.
루카……
왜 그러시죠?
아니…… 아까도 그랬지만 조금 의외였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넌 형님의 명을 받아
할 수 없이 해방군에 참가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어.
……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저에겐 이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도 긍지가 있습니다.
설령 원치 않는 길 한복판에서 쓰러지게 될지라도
스스로를 부끄럽다 여길 만한 인간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클레베. 전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루카……
당신에겐, 제게 없는 올곧음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게 이 나라를 구할 유일한 희망입니다.
당신을 믿는 자들 모두를 위해서도……
과거를 슬퍼할 여유는 없습니다.
……그래, 알고 있어.
고마워, 루카. 난 이제 괜찮아.
하지만…………
하지만…… 뭔가요?
아니, 『이 나라를 구할 유일한 희망』이라.
마치, 예언의 용사 같단 생각이 들어서.
예언의 용사? 그, 옛날이야기 말입니까.
그래.
이 세계가 어둠으로 뒤덮였을 때 용사가 악의 무리를 해치울 것이다……
정말이지, 꿈 같은 이야기야.
용사가 나타날 거라면 바로 지금이 적기인데 말이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하핫, 글쎄. 태평하게 자고 있을지도 모르지.
용사가 아닌 우리는 땅을 기고, 흙탕물을 마셔서라도
그저 계속 우직하게 싸워 나가는 수밖에 없는 걸까……
자, 아지트로 가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자.
클레베……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