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 만들어진 굉장히 넓은 묘지.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왕가 사람도 이곳에 묻혀 있다.
기다려.
여긴 해방군의 아지트다. 수상한 녀석은 지나갈 수 없어.
엣? 아, 우리는……
파이슨……
장난치지 마세요. 아름군이 당황했잖아요.
후훗…… 루카, 살아 있었구나.
남쪽 요새에서 뻗어 버린 줄 알았다고.
이쪽이 소문 무성한 영웅 마이센의 손자?
맞습니다. 클레베는 안쪽에?
그래, 얼른 가 봐.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 잠깐!
아…… 왜?
안쪽엔 몬스터가 나오니까 조심해.
뭐?!
아지트인데 몬스터가 나온다고?
아지트라곤 해도 우리가 오래된 지하 묘지를
멋대로 쓰고 있는 것뿐이니까.
미라의 힘이 미치는 부근에서는 몬스터가 나오기 쉽다는군.
아무리 쓰러뜨려도 끝이 없길래 요즘엔 방치하고 있어.
뭐, 여기 있는 몬스터에게 뻗을 정도라면
해방군에서 싸우는 건 무리라는 얘기지.
아무쪼록 힘내라구.
이, 이거 뭔가……
터무니 없는 곳에 온 것 같은데……
클레베님은 안쪽이야. 얼른 가 보지?
지하에 펼쳐진 거대한 묘지. 신분 높은 자들이 잠든 유서 깊은 장소다. 하지만 지금은 몬스터가 되어 되살아난 죽은 자들의 악취로 가득 차 있다.
클레어!!
오라버니!
아아, 다행이야…… 클레어……!
너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나는……
오라버니…… 안색이 안 좋아요. 미안해요, 걱정 끼쳐서.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아름과 친구들이 구해 줬거든요.
아아…… 네가 아름이구나.
앗…… 네, 네.
하하…… 그렇게 어렵게 대하지 말아 줘.
너는 내 여동생의 은인이야. 편하게 대하도록 해.
나는 클레베. 이 해방군의 리더를 맡고 있지.
잘 부탁해, 아름.
자, 잘 부탁해. 클레베.
대단해…… 진짜 클레베야.
응? 저 사람 유명해?
로빈…… 너, 모르는 거야?
클레베 하면 소피아 기사단의 지휘관에
왕국 제일의 기사라고 알려져 있잖아.
우, 우와…… 엄청난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는데도 도제한테 지는 거야?
그건…… 정곡을 찌르지 마.
클레베. 그래서 현재 상황은?
좋다곤 말할 수 없어.
남쪽 요새에서의 패배로 또 수많은 동료를 잃었어.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버렸지.
그래서 마이센경을 꼭 모시고 싶었는데……
……할아버지는 분명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야.
그게 대체 뭔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 몫까지 싸워서 반드시 도움이 되도록 할게.
그러니까……!
아름, 알고 있어.
우리도 마이센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것보다……
너에게 마이센경을 대신해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아…… 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그래? 그럼 사양 않고 말하지.
우리 해방군의 새로운 리더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
…………뭐어?!
내, 내가 리더를?!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클레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헛소리도 정도껏 하도록 해!
나는 진심이야.
페르난. 너도 알고 있겠지.
소피아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해방군도 지금은 대부분이 평민 출신의 지원병들이야.
아무리 뜻을 함께 한다고 해도 귀족인 내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힘들어.
마이센경은 일개 병사에서 기사가 되어 백작의 지위에까지 오르신 분.
그렇기에 지금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계신 거야.
그 손자인 아름이야말로 우리 해방군의 상징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할 리가!
평민들 따위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쫓아 버리면 될 일.
페르난……
그런 짓을 할 여유가 지금의 해방군에 있다고 생각해?
…………
저는 찬성입니다.
루카?!
아름군의 실력은 기사단 출신인 여러분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클레베의 통솔력이 한계에 부딪친 지금,
새로운 리더로 적합한 인물은 그 외에는 없겠지요.
이 녀석…… 말 조심해라!
저는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남쪽 요새에는 오랜 시간 함께 싸워 온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 싸우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기…… 기다려! 잠깐만.
그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고 말했지만……
물론 그렇게까지 많은 건 바라지 않아.
실질적인 관리는 지금까지처럼 우리가 하도록 할게.
너는 그저 리더 자리에 앉아 주기만 하면 돼.
그걸로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 통솔이 가능해진다면 괜찮은 일이잖아?
이거야말로 마이센경의 손자인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저, 정말 그럴까……
아름…… 저도 간곡히 부탁할게요.
오라버니의 마음은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아요.
부탁이에요. 오라버니를 도와주세요……
클레어……
……………… ………………
……알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해 볼게.
정말이야? 아름!
고마워, 정말 다행이야.
그, 그렇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 줘.
하하…… 그래, 알겠어.
아아, 다행이다……
괜찮아요, 아름이라면 틀림없이 훌륭한 리더가 될 거예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작작 좀 해! 클레베!!
페르난……
난 네가 리더였기 때문에 이 해방군에 참가한 거야!
그런데 이게 뭐야. 이런 평민 꼬맹이가 리더라고?!
평민이 아냐. 그는 마이센경의 피를 이었다고!
그 마이센도 영웅이라며 사람들이 추켜세우긴 하지만
애초에 근본은 어떤지 알려지지도 않았잖아.
그런 자를 명예로운 우리 소피아 귀족으로 인정할 순 없어!
그런 늙어 빠진 자의 이름에 기대다니…… 너도 약해졌구나, 클레베.
페르난……!
나는 예전부터 불만이었어.
애초에 이 해방군의 목적은 전통 있는 귀족의 이름으로
이 소피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런데 요즘 들어 군의 핵심에까지 평민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잖아.
너의 부관인 폴스나 파이슨도 마찬가지.
그들은 전장에서 그에 상응하는 공적을 올리고 있어!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응하는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병사들의 불만이 쌓여 해방군을 운용할 수 없어.
페르난……
네가 평민들을 곱게 보기 힘들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의 이상을 위해서라도 현실을 직시해 줘.
……그건 힘들겠어, 클레베.
평민 꼬맹이에게 무릎을 꿇을 바에야 나는 죽는 편이 나아.
아무래도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인가 보군.
나는 해방군에서 빠지겠어.
……안녕, 클레베.
페르난……!
괘, 괜찮은 거야? 클레베!
……그래.
요즘 들어 페르난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어. 언젠가 이렇게 될 것 같았지.
나의 이상에 그가 무리를 해서까지 따를 필요는 없지.
이게 다행인지도 몰라.
클레베……
나……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할게.
아름…… 고마워.
준비가 다 되면 이젠 정말 소피아 성으로 향하게 돼.
아직 해방군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겠지?
여기 있는 자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거야.
페르난님이 평민을 싫어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아무래도 최근의 가뭄으로 기근에 시달리던 영지 사람들이
영주인 페르난님의 저택을 습격해 가족을 잃은 모양이니까.
나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소피아 성에는 지금 리겔의 장군이 와 있다는군.
듣기로는 황제 루돌프의 조카에, 차기 황제라는 얘기까지 있다더군.
황제에겐 자식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그 녀석, 엄청 강하다던데.
아아~ 그런 녀석과 싸우고 싶진 않은데……
기사단에는 클레베님의 연인인 마틸다님이 계셨어.
클레베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하고 총명한 분이지.
그런데 도제에게 붙잡혀 녀석의 요새에 감금되어 버렸지 뭐야.
도제는 몇 번씩이나 마틸다님을 내세워 항복하라고 협박한 모양이지만
클레베님은 응하지 않았어.
마틸다님도 언제까지 목숨을 부지하실지……
클레베님의 지휘가 날카로움을 잃은 건 이 일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해.
안녕, 만나서 반가워. 너희 모두를 환영해.
내 이름은 폴스. 클레베님의 부관이야.
소피아 성에는 당연히 나도 데려가 줄 거지?
폴스를 동료로 영입하겠습니까?
그, 그래…… 아냐, 신경 쓰지 마.
빈자리를 지키는 것도 훌륭한 임무니까 말야.
무슨 일이야? 내 도움이 필요해?
뭐야, 드디어 출발인가.
어, 나? 난 아무래도 좋은데.
따라가도, 안 가도…… 그러니 네가 정해 줘.
파이슨을 동료로 영입하겠습니까?
아, 그래? 그럼 알아서 잘해 보라고.
……뭐야.
날 데려가고 싶으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해 보시지?
자, 목표는 소피아 성이야.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제로부터 저 성을 되찾아야만 해.
기대할게, 리더.
으, 응……!